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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과 기억: 왜 감정이 섞인 기억은 쉽게 잊히지 않을까

하루하루오늘 2025. 11. 6. 13:50

한 번쯤 이런 경험이 있을 겁니다. 평범한 하루의 일상은 금세 잊히지만, 처음 사랑에 빠졌던 순간, 무대에서 느낀 긴장감, 슬픔에 울었던 날은 오랫동안 생생하게 남습니다. 이처럼 감정이 얽힌 기억은 단순한 정보보다 훨씬 오래 지속됩니다. 이번 글에서는 감정과 기억의 관계에 대해 소개해드릴 예정입니다.

감정과 기억: 왜 감정이 섞인 기억은 쉽게 잊히지 않을까
감정과 기억: 왜 감정이 섞인 기억은 쉽게 잊히지 않을까

감정이 기억을 강화하는 이유

감정이 관련된 기억이 단순한 기억보다 오래 남는 이유는 편도체(Amygdala)해마(Hippocampus)의 상호작용에 있습니다.
해마는 새로운 기억을 저장하는 역할을 하고, 편도체는 감정의 강도를 조절하는 기관입니다. 이 두 부위가 함께 작동할 때, 감정의 에너지가 기억의 ‘우선순위’를 결정합니다.

예를 들어, 공포나 위협 같은 감정은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에 편도체가 강하게 활성화됩니다. 이때 분비되는 아드레날린과 코르티솔은 해마의 기억 형성을 촉진시켜, 위기 상황의 세부까지 뇌에 각인시키죠. 그래서 교통사고나 자연재해를 겪은 사람은 그 장면을 잊지 못합니다.

반대로, 감정이 거의 없는 정보 — 예를 들어 통계 수치나 무미건조한 문장 — 는 해마의 활성도가 낮아 금세 잊힙니다.
즉, 감정은 기억의 ‘접착제’와 같습니다. 강렬한 감정이 있을수록 정보가 더 깊이 각인되고, 더 오래 유지됩니다.

 

감정의 종류에 따른 기억의 차이

모든 감정이 기억을 강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감정의 종류와 강도에 따라 기억이 저장되는 방식은 달라집니다.

① 긍정적 감정 – 반복과 확장
행복, 성취감, 애정 같은 감정은 뇌의 보상 시스템(reward system)과 관련된 도파민(Dopamine)을 분비시킵니다.
이 신경전달물질은 해마의 신경세포 간 연결(시냅스)을 강화해, 긍정적인 경험을 반복하고 싶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즐거운 여행, 맛있는 음식, 따뜻한 대화를 쉽게 떠올리며, 비슷한 경험을 또 원하게 됩니다.

② 부정적 감정 – 각인과 경고
반면 두려움, 분노, 슬픔 등은 뇌가 ‘위험 신호’로 인식합니다.
이때 분비되는 스트레스 호르몬은 단기적으로 기억 형성을 강화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해마를 손상시킬 수 있습니다.
즉, 적당한 공포는 기억을 강화하지만, 지속적 트라우마는 기억 체계 자체를 망가뜨릴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환자들은 특정 장면이 원치 않게 재생되는 ‘침습적 기억’을 겪습니다.

③ 감정의 강도 – 곡선의 법칙
심리학자 예르크스와 도드슨(Yerkes–Dodson)은 ‘감정의 강도와 기억력’의 관계가 역 U자 곡선(U-shaped curve)을 따른다고 설명했습니다.
감정이 너무 약하면 기억이 잘 형성되지 않고, 너무 강하면 오히려 해마의 기능이 위축되어 기억이 왜곡됩니다.

결국 적절한 긴장과 감정의 몰입 상태가 기억에 가장 유리합니다.

 

감정과 기억의 상호작용 – 우리가 감정을 통해 배우는 이유

감정이 기억을 강화하는 것은 단순한 생리적 현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경험을 통해 배우는 진화적 장치입니다.

예를 들어, 뜨거운 냄비를 만졌을 때 느낀 통증은 뇌에 ‘위험’으로 각인됩니다. 다음부터는 같은 상황을 회피하게 되죠.
반대로, 칭찬을 받거나 성취감을 느꼈던 경험은 뇌가 “이건 좋은 행동이야”라고 기록하여, 유사한 행동을 반복하게 만듭니다.
즉, 감정은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행동을 조정하는 기억의 가이드라인입니다.

이 원리는 교육과 인간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감정이 동반된 학습은 단순한 암기보다 훨씬 오래 남습니다. 그래서 교사들이 “감동이 있는 수업”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한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우리가 누군가를 특별히 기억하는 이유는 그 사람과의 ‘감정의 진폭’이 컸기 때문입니다.

최근 신경과학 연구에 따르면, 감정적 사건을 떠올릴 때 편도체와 해마뿐 아니라 전전두엽(Prefrontal Cortex)도 함께 활성화됩니다. 이는 감정적 기억이 단순한 본능의 산물이 아니라, 사고와 판단을 동반한 복합 인지 과정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감정을 통해 배울 뿐만 아니라, 그 감정을 ‘이해하고 해석’함으로써 더 성숙한 기억을 만들어갑니다.

 

감정이 없는 기억은 흑백 사진과 같습니다.
정보는 존재하지만, 생생함이 없습니다.
반면 감정이 담긴 기억은 색이 입혀진 한 장의 그림처럼, 세월이 지나도 선명하게 남습니다.

우리는 감정을 통해 세상을 느끼고, 그 감정을 기억 속에 새기며 성장합니다.
기억은 과거를 담고 있지만, 감정은 그 기억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결국 감정이란 기억의 틀을 짜는 붓, 그리고 인간다움을 완성하는 마지막 조각입니다.